“참된 복은 역설의 진리 속에 있습니다” 마태 5:1-12, 강인국목사
역설이란 단어가 있다. 역설이란, 논리적으로 모순적인 것 같지만 그 속에 심오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수 많은 역설의 진리가 담겨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고, 공의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랑과 공의는 서로 반대적인 개념이다.
예) 어떤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온통 무법천지가 되었고, 범죄 소굴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죄 지은 사람을 모두 사형시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 세상에 아무도 살아남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사랑을 따르자니 공의가 울고, 공의를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이 둘이 같이 갈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골치가 아프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공의와 사랑, 둘 다를 추구하고, 둘 다를 만족시킨다.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두가지 중심 축이다. 그 외에도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의 진리가 가득하다.
** 오늘 본문의 팔복에도 역설의 진리가 가득하다.
*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한국사람들은 인사할 때 “부자 되세요”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와는 관계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정신적인 풍요로움, 정신적인 부요함을 좋아하지, 정신적인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씀은 매우 독특하고, 일반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상충하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는 팔복에 관해서 하나씩 강해할 때 말씀드리겠다.
* 4절에 보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이라는 것은 즐겁고 웃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웃으면 복이 와요. 중국: 소문만복래; 웃는 집에 만 가지의 복이 대문으로 들어온다.
이와 같이 복은 웃음과 함께 온다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세상에,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 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어떻게 참혹하게 핍박을 받는 것을 복이라고 할까? 어떻게 채찍을 맞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하는 것을 복이라고 할까? 여러분 중에 그런 것을 본적 있는가?
한 아들이 밖에 나가서 친구에게 맞아서 얼굴에 피멍이 들어서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본 부모가 말한다. “너 참 맞기 잘했다. 내 아들, 참 잘했다.” 그럴 수 있을까?
요즘, 동양인 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가족이 밖에 나가서 공격을 당해서 잇빨이 부러지고, 뼈를 다쳤다. 그런데, 그래 잘했다. 핍박을 받는 것이 복된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 사람들은 풍성한 것이 복이라고 하고, 웃고 즐거워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가난한 것이 복이고, 슬퍼하는 것이 복이고, 핍박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훌륭한 하나님 일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사랑하실까?
사람은 신이 사람들에게 온갖 좋은 복을 쏟아 주어도, 사람들은 그 신을 믿을까 말까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향해, 가난한 것이 복이다, 슬퍼하는 것이 복이다, 핍박받고 고통 당하는 것이 복이다고 한다.
** 사실, 사람의 눈에는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복이 아닌 것이 많다.
사람들은 물질이 많으면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이 많아서 불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한 부자 집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 준 비싼 스포츠카를 친구들과 함께 타고 스피드를 즐기다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사 줄 정도로 부자가 아니었으면, 그 아들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 지도 모른다.
미국의 유명 정치가요 굉장한 부를 가진 존 F. 케네디의 아들은 개인 비행기를 구입하여서 스스로가 파일럿이 되었다. 자신의 비행기에 가족을 태워서 여행을 가다가 치명적인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 비행기 살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가족들이 행복하게 잘 살지도 모른다.
한국 소설 문학 중에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란 소설이 있다. 여주인공은 벙어리에 자능도 낮다. 그 여인은 할 줄 아는 말이 아다다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여인의 이름은 아다다이다. 아다다는 장성하여서 한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둘은 서로 아끼며 재미있게 살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돈도 상당히 벌었다. 돈이 많아지자, 남편은 벙어리 아다다를 두고 한 신식 여자를 집으로 데려 온다. 아다다는 그 돈 때문에 남편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다다는 집에 있는 모든 돈을 들고 나가서 강물에 뿌려 버린다. 내용을 줄이기 위해서 제가 소설내용을 약간 편집하였다.
사실, 이 비슷한 내용이 사람들의 실제의 삶에 너무 많이 일어난다.
** 또, 그 반대되는 일도 많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는 통계가 있다.
어릴 때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고, 시련과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 입지적인 사람으로 역사에 남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은 어릴 때 가족으로부터 무시 당했고, 젊어서는 사울 왕으로 부터 온갖 시련을 겪었다. 그는 살아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은 그런 시련의 기간을 통해서 삶을 겸허하게 살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위대한 왕이 되었다.
사람은 가난을 경험할 때에 성실한 삶을 살게되고, 사람은 슬픔을 통해서 삶의 참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사람은 아픔을 통해서 인격이 성숙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사람은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삶을 더욱 의미있게 살고, 하나님의 참된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마음, 슬픈 마음, 괴로움 가득한 삶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열매가 아니라, 그 보이는 것 뒤에 오는 결과까지 보면서 말씀해 주신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진리는 세상의 생각과 다르고, 철저히 역설적이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큰자는 섬기는 자라고 하셨고, 나중 된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 빰까지 돌려 대라고 하셨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은 철저히 역설적이다.
설교 초두에서 공의와 사랑, 이 둘은 서로 반대적인 개념이라고 말씀드렸다. 사랑을 따르자니 공의가 울고, 공의를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이 둘이 같이 갈 수 없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 기독교은 이 두가지의 모순되는 진리를 다 만족시키는 종교라고 말씀드렸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죄 많은 세상에 보내셨다. 그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 많은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대신에 죽게 하셔서 공의를 이루시고, 우리를 살려 주심으로 사랑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역설의 진리를 완성시키셨다.
때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시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믿고 승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