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까지 적시는 슬픔이여 복되도다” 마태 5:1-12,
2021.5.9. 강인국목사
오늘은 어머니 주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도 조명해 보기 원한다.
* 먼저 애통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생각해 보자.
헬라어로 슬픔에는 두 단어가 있다. 일반적인
슬픔은 루페오마이(lupeomai)이고, 강한 슬픔은 펜떼오(pentheo)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쓴 단어는 펜떼오이다.
전번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때, 가난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극심한 가난이라고 말씀 드렸다.
오늘 펜떼오의 슬픔은 그냥 슬픈 감정이 아니라, 마음이
찢어지는 큰 슬픔을 말한다.
이 단어는 너무 슬퍼서 눈물 흘려 울지 않을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한글 성경에서는 애통이라고 번역했다, 애통은
슬픔과 고통을 합한 단어이다.
애통은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고 통곡하는 모습을 말한다.
영어에서는 mourn, 슬퍼하여 울다라는
의미이다.
과연 누가 통곡하며 울 수 밖에 없는 펜떼오의 슬픔을 당하는 것을 좋아할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찢어지고, 슬픔을 당하여 우는 것을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 왜 펜떼오의 슬픔을 경험하는 것이 복된 것인가?
1. 사람은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영혼이 맑아지고 순수해 진다.
성경에서 가장 애통하는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 중의 하나는 누구일까? 다윗왕이다.
다윗 왕은 눈물에 침상을 띄웠다고 말했으며(시 6:6),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시 42:4), 눈물을 주의 눈물병에 담아 주소서(시 56:8) 라고 기도했다.
제가 상한 감정의 치유를 주제로 말씀나눌 때, 눈물은
사람을 치유시킨다 라고 말씀드렸다.
다윗이 수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시련을 겪었다. 다윗이
그 시련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 자신이 흘린 눈물이 또한 자신의 상한 마음을 많이 치유하였다.
사람이 고통 중에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자신의 상한 마음을 치유한다.
그리고, 다윗은 일생동안 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흘린 귀한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울 때, 마음의 괴로움도 떠나 보내는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를 가져온다.
사람이 울 때, 마음의 아픔을 씻어내는 카타르시스, 감정의 해소를 가져온다.
눈물은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묘약이요, 고통의
감정을 순화하고 정화시키는 시약이다.
그래서, 애통하는 것dl 복이 되기도 한다.
* 남자와 여인의 품성 중에서 여성의 품성이 더 탁월하다는 점은 무엇인가?
여인은 남성에 비해서 슬픔에 민감하고 눈물이 많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지만…
자녀는 어머니의 눈물로 자란다. 어머니는
좋아도 울고 안타까워도 울고 슬퍼도 운다.
어머니는 눈물로 더욱 위대해진다. 여인들이
장수하는 것은 눈물의 힘도 영향이 많다.
2. 사람은 아픈 것 만큼 성숙하고 변화한다. 그래서
애통하는 것이 복되다.
어떤 것이 일반적인 슬픔이고, 어떤 것이
펜떼오 슬픔인가? 그것을 나누는 것은 힘들다.
부모가 돌아가신 것은 펜떼오 슬픔이고, 이웃
사람이 죽은 것은 그냥 슬픔인가?
펜떼오 슬픔은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어떤 의미있는 슬픔을 말한다.
* 독일의괴테(Goethe)는 문학가, 철학자, 과학자이다. 그는
한 주의 재상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7개 국어에 통했다. 나는 그를 <슬픔의 철학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 라고 하였다.
“눈물 젖은 빵”의 의미는 사람이 살아 가면서 슬픔과 어려움을 혹독하게 체험한 것을 말한다.
인생의 슬픔을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참 의미를 알고 성실하고 겸손하게 산다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탑을 우뚝 세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의 성공 뒤에는 그들을 결심하게 만든 사건, 좌절을 경험하고
눈물을 흘린 사건이 있다. 그래서 눈물없는 성공은 없다는 말이 있다.
* 한국인 배우로 최초로 아카데미 상을 받은 윤여정, 그 여인을 있게 한 사건은 무엇인가? 그 여인은 이혼이라는 큰 아픔을 경험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느날 자녀 둘의 삶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계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연기를 했습니다. 그분에게 큰 아픔이
있었기에 그는 아카데미라는 상을 받는 금자탑을 쌓았다.
* 저에게 있어서의 큰 슬픔은 저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저의 아버지는 51 살의 나이에 돌아 가셨다. 내가 어릴 때 부터 가지고 있었던
내 마음의 공허감은 저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욱 캄캄하고 크고 깊어졌다. 아,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고 슬픈 것이구나. 만약, 영원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있을까? 그래서, 영원한 삶을 알기 원하여 신학대학을 가게 되었다.
솔로몬 왕은 말하기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며,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근심함으로 사람의 마음이 유익하게 된다고 말한다(전7:2,3).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그 슬픔과 눈물을 통해서 더욱 순수하고 더욱 성숙해 지는 시간이다.
3. 슬픔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보다 눈물의 사람에게 집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 보다도 눈물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이 들어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어머니 중의 한 분인 모니카가 있다. 모니카는 타락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서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훗날 어가스틴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새로이 변화된 자신이
있다고 고백했다.
저에게도 눈물로 기도해 주셨던 어머니가 계신다. 올해는 어머니 없이 어머니날을 맞이한 첫번째
해이다. 눈물로 기도하시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에게 감사드린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당신이 마지막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였는가? 눈물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4. 사람은 큰 슬픔을 경험할 때 영혼의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일까?
어린 자녀에게 가장 큰 슬픔은 부모를 잃은 슬픔일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은 자녀를 잃은 슬픔일 것이다. 특히, 자녀를 잃은 부모를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안타까움과 슬픔을 잊지 못할 것이다.
큰 슬픔은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준다고 말씀드렸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펜떼오의 슬픔은 사람의
영혼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사람이 영혼까지 적시는 슬픔을
당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슬픔은 사람이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이다.
* 성경에는 자신의 죄의 문제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라며, 자신의 죄의 문제로 괴로워했다(사
6:5).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슬피 울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마 26:75).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며 한탄하였다(롬
7:24)
* 영국의 존 번연은 청년의 나이에 군대에 입대해서 전쟁에 나갔다. 그는 지옥같은 전쟁터에서 전우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그는 그 때부터 죽음과 영원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영국은 청교도들을 탄압했는데, 그는 감옥에 갇혀서 저 위대한 <천로역정>을 완성했다.
그 <천로역정>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이렇게 독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손에 책을 들고 등에는 커다란 짐을 진 채 길 옆에 서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를 보았다. 그는 책을 펴서 읽더니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말했다. “어찌
해야 좋을까?”
그 성도는 자신의 죄의 문제로 슬피울고 있는 곧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로 괴로워하는 이사야선지자를 위로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하나님은 죄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두 손으로 안아 주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위로해 주신다.
결: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 눈물이 있을 때 서로를 치유하고 성장시키고 변화시킨다. 부모의 눈물이 자녀들을 성장시키고, 아내의 눈물이 남편을 변화시키고, 남편의 눈물이 아내의 상처를 치유한다.
사람은 영혼깊은 곳까지 스며든 슬픔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
괴태의 시를 좀 더 음미해 보자.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자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괴테의 시 <하퍼연주자의 노래>에 나오는 문장을 조금 바꾸었다.
괴테가 쓴 원래 시는 이렇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내본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괴태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픔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하늘의 권능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우리 성도님들은 슬픔을 경험하고 고민하며 밤을 새웠기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 우리가 세상에서
괴로움과 슬픔을 겪을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 우리는 진정으로 복 받은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