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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는 갈증, 복된 갈증” 마태 5:6,
본문의 “주리고와 목마름”은 단순한 굶주림이나 목마름이 아니다. 헬라어 원어에 보면, 이 단어는 사람이 며칠 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해서 입술이 갈라지고 탈진하여 죽을 것 같은 굶주림과 목마름을
말한다.
그리고, 이 ‘주리고
목마름’이란 단어는 사람이 자유, 명예, 명성, 부 등을 가지기 원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한 남자 아이가 한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이
소년은 하루 종일 그 소녀를 생각한다. 앉으나 서나, 밥먹을
때나 TV볼 때도 그녀 생각. 이 소년은 사랑에 목 말랐다.
사람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사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그러하다.
사람은 학위를 따고, 연구의 결과를 얻고, 사업으로 이익을 남기고, 회사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해서 공부하고, 밤을 새워 연구하고, 온갖 사업을 일으키고 인정받기 위해서 온갖 구상을 하고 노력한다.
그와 같이 사람이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얻고, 인기를 얻고, 물질을 쌓고,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것을 원하는 싸이클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원하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고, 더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사람은
어떤 것을 추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애만 타고, 행복하지
못하다.
* Tantalize (애타게 하다. 괴롭게 하다, 얻을 수없는 것을 약속하여 괴롭히는 행위)라는 영어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기원은 이러하다. 그리스 신화에 제우스의
아들인 탄탈루스 왕은 신들을 시험한 죄로 제우스로 부터 형벌을 받는다.
탄탈루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뒤로 물러나 버렸다. 수 많은 과일들이 나무에 주렁 주렁 메달려 있지만, 탄탈루스가 과일을
따기 위해서 손을 내밀면 그 과일들이 뒤로 물러나 버렸다. 탄탈루스 왕은 일평생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살아간다.
그 신화로 인하여서 Tantalize (애타게
하다, 괴롭게 하다)라는 단어가 생겼다.
이 의미는, 사람은 일생동안 뭔가를 가지기 위해서
애태우고, 갈망하지만, 그것을 가졌을 떼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시 애 태우고, 끝없이 반복한다. 사람은 영원히 갈망하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우리 인생은 일생동안 뭔가를 이룰듯 말듯 애 태우며 살고,
그것을 반복하며 산다.
**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주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사람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의”를 추구하고 열망할 때 그 속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 “의”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마 6:33에서 “의”를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는 일들을 의미한다.
* 나는 하나님의 의를 3가지로
말하고 싶다.
1. 나와 이웃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노력하고, 2.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선을 행하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3. 주님의
인격을 닮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등이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런 의로운 일들을 행하는 것은 절대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류의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눈물과 인내와 헌신이 따른다.
내 개인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과 처음 교회 나오는
분들이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목장은 그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고 온갖 전략을 짜야 한다.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와 목원 식구들은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개인들은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닮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내
배우자가 놀라고, 가족이 놀라고, 친구들이 놀라고, 교회 식구들이 놀랄 정도로 나의 인격에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성도는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서 굶주리고 목마른 짐승이 마실 물과 음식물을 찾아 헤매듯이
추구해야 한다.
예) 19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의 마음에는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 당시 학생들은 모이면 민주주의 이야기였다.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학생들은 시위를 하며 독재자와 싸웠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싸웠다. 나는 그들에게 빚진 자이다.
지금 미얀마의 백성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열망하며 전국민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싸우고 있다. 저들의 전 관심과 대화 내용은 미얀마의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나깨나 이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나라로 만들것인가를 밤새워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 속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건설할 것인지를 처절하게 고민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갈 때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되고,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더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예) 바다에서 배가 난파 당했다.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은 목이 말랐다. 그래서 바닷물을 마시면? 삼투압 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낮은 농도의 액체는 진한 농도 쪽으로
흐른다. 사람의 몸 속에는 약 1% 미만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고, 바닷물에는 약 3%의 염분이 있다. 사람이 목이 말라서 바닷물을 마시면, 삼투압 작용으로 세포 속의
물이 몸 밖으로 빠져 나온다. 그래서 사람은 즉시 더 강열한 목마름을 느낀다.
그래서 갈증은 반복되고 더 강해진다. 그것이 반복되면
내 몸 속에 있는 체액이 다 빠져 나오고 죽게 된다.
세상을 향한 사람의 갈구는 그와 같다. 우리가
세상을 통해서 갈증을 해소하려 하면, 그 갈증은 끝 없이 반복된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갈증을 완벽히 해소시켜 주는 것은 없다.
결: 요 4장, 수가 성의 한 여인은 다섯번의 이혼을 하고 6번째 남자를 만나서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여인은 남자를 통한 행복을 얻는 목마름을 채워지지 않았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모든 갈증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6:35)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대한 갈증은
끝없이 반복되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인도한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추구하여서 모든 갈증이 해소되고 참된 평안과 행복을 가지기 바란다.